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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빈, 530GP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 전말에 [당혹사2]

태욱마덜 2021. 8. 21.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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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유빈이 '당혹사 2'에서 530GP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 전말에 안타까워하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2(이하 '당혹사 2')'에 출연해 총기난사 사건과 관련된 음모론을 파헤쳤다.

530GP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은 지난 2005년 6월 19일 새벽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은 일이다.

음모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전 사건의 전말을 듣던 유빈은 "범인이 아닌 척했으면서 왜 자백을 하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건 김일병의 범행이 아니라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와 함께 공개된 증거 사진과 영상을 본 유빈은 "나 같아도 의심했을 거 같다"라고 말하며 공감했다.

북한 군인의 월남 이야기 도중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유빈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자 다른 출연자들이 웃으며 다소 긴장된 분위기를 풀기도 했다.

이어 당시 사건 검안의가 인터뷰 영상에 등장하자 유빈은 깜짝 놀라면서도 "당시 유가족분들이 부검을 원하지 않았다"는 검안의의 말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유빈은 "수류탄이 터졌는데 어떻게 내무반이 그렇게 깔끔할 수 있었는지?", "부검을 왜하지 않았는지?" 등 사건에 몰입하며 예리한 질문을 쏟아냈다.

끝으로 유빈은 "진실을 꼭 밝혀달라"고 호소하는 사건 피해자의 아버지의 인터뷰에 속상함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떨궜다.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 시즌2'(이하 '당혹사 2')가 '530GP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을 둘러싼 음모론을 파헤친다.

기획 주의자 윤종신의 집에 영화감독 변영주, 코미디언 송은이, 배우 봉태규, 가수 유빈, 여기에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교수가 모여 16년 전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모두가 잠든 시각, 그 비극은 시작됐다.' 2005년 6월 19일 새벽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530GP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누군가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무려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은 대형 사건이었다.

범인은 놀랍게도 그날 선임과 함께 야간 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던 김일병이었다. 육군 조사단은 그의 범행 동기를 선임들의 가혹행위와 언어폭력 때문이라고 서둘러 발표했고 3년의 군사재판 끝에 김일병은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그렇게 이 사건은 '김일병 총기난사사건'으로 마무리됐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가는 듯했다.

그런데 16번째 추도식 현장에서 생각지도 못 한 일이 벌어진다. 사망한 육군 장병들 묘역 앞에 생존 병사가 자신이 쓰던 군용 수첩과 부대마크를 두고 사라진 것이다. 수첩 속에 담긴 의문의 메시지는 무엇이고 생존 병사는 대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 이야기해 본다.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건의 진실이 따로 있다고 믿는 음모론자들은 530GP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김일병이 아니며 심지어 사형 선고를 받은 김일병이 현재 교도소에 없다고 믿고 있다. 대체 이 음모론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왜 무엇 때문에 이토록 충격적인 얘기가 떠돌고 있을까.

당시 김일병의 현장검증 장면이 방송에 공개된다. 김일병은 현장에서 "수류탄을 던짐과 동시에 내무반을 나갔다. 누군가 뛰어가는 걸 보고 계속 난사를 했다"는 김일병의 자백은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이처럼 구체적인 자백이 있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 병사들이 존재하는 사건에 왜, 음모론이 피어나게 됐을지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은 그 첫 번째 근거로 '당시 현장의 상태'를 꼽는다. 너무도 멀쩡한 내무반 천정과 선풍기가 '수류탄이 이곳에서 터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수류탄과 총기에서 김일병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고 공격을 당한 피해 병사들의 몸 안에서 발견된 '사각 형태의 파편'도 의문을 더 했다.

결정적으로 사건이 벌어진 그 무렵 이 지역에서 벌어진 한 사건은 530GP 사건에 감춰진 비밀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자아냈다. 북에서 몰래 내려온 한 북한군이 군 당국에 체포된 것이다.

그런데 이틀 뒤 국방부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신속하게 월남한 북한군이 대공 용의점이 없는 단순 귀순자라고 발표한다. 바로 530GP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진 그날이다. 이 북한군의 월남과 530GP 사건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지 혹시 530GP 사건의 배경에 이제껏 알려진 것과 다른 진실이 숨어있는 걸지 그날을 추적한다.

고 김종명 중위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밝혀졌으면 좋겠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이에 변영주 감독은 '어쩌면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이 분들에겐 지금 떠도는 음모론이 가장 큰 위로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고 함께한 멤버들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프로파일러 권일용 교수는 재판 기록을 바탕으로 사망자의 위치와 상태를 면밀히 살펴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진짜 그날의 얘기를 재구성해 보았다. 사망한 8명의 병사 그들의 마지막 행적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1. 개요

 

2005년 6월 19일 경기도 연천군 소재 대한민국 육군 제28보병사단 제81보병여단 수색중대 530GP에서 김동민 (1984년생, 당시 20세) 일병이 내무실에 핀이 해제된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여 8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이른바 '김일병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범인 김동민 일병은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 국군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2. 상세

사건 당일 전방 GP에선 사고 발생 당시 북한군의 공격으로 상황이 전파되기도 했지만 오래 안 가 정정되었다. 모 사단에서 당직 맡던 군필자의 말에 의하면 초기 상황 연락 보고 받을 당시에는 영현 백과 함께 태극기를 준비해달라는 보고가 있었으나, 이내 정정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의 희생자 유족 중 일부는 아직도 이 일이 북한군의 소행이라 믿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국군 교도소에 수감 중인 가해자 김동민을 찾아 면회신청을 줄기차게 하고 있으나(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김동민은 이들의 면회를 거절하고 있다.

2.1. 원인

2000년대에 들어오자 그래도 군대에서 노골적으로 대놓고 패거나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루는 일은 많이 줄어드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건 인식이 바뀐 게 아니라, 감시해서 구타를 못하게 막으니까 벌어진 것이므로 독립부대의 구타는 여전했고, 가해자 김동민 일병 본인도 다른 GP에서 이미 이런 일을 겪다가 견디다 못해 사고를 치고 전입을 온 자원이기도 했다. 해당 GP에서 심한 부조리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마찰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아마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해 총기난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3. 사건의 여파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대한민국 국군은 발칵 뒤집혔고, 특히 육군을 위주로 모든 부대에 걸쳐 부대 조사와 소원수리가 행해졌다. 전군적으로 병영문화 혁신 운동이 일었고 그 유명한 웃음 벨도 이때 개발되어 뉴스까지 탔다. 육군 내 만연했던 구타, 갈굼, 가혹행위, 기수열외, 내무부 조리 등 병영의 악습들이 본격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도 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그나마 긍정적으로 개선점을 찾은 것으로 평가할만한 점이다. 특히, 육군 28사단은 전면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재편되는 굴욕을 당했다. 당시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이 전부 군복을 벗게 되었고 군단장에게는 경고장이 발부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감독하던 담당 병기 부사관은 아예 보병으로 전과되었다. 이후 28사단 역시 내무부 조리가 많이 사라져 갔지만, 또다시 2014년에 윤 일병 사건이 일어나면서 여전히 완전하게 개선되지는 않았음을 잘 보여줬다. 갈 길이 참으로 멀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이 사건은 육군에게는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내부 부조리가 심한 군대의 특징은 굉장히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2005년 논산 육군훈련소 인분 사건 당시에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당시 육군 훈련소장 허평환 소장]은 MBC 기자에게 보도하지 말아 달라는 청탁까지 하는 막장 짓까지 했을 정도였지만 결국 폭로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대대적인 관리와 감시가 이루어지고 이전보다는 좋아졌는데, 감시 체계가 투명해지는 것만이 가혹행위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것이다.

지금은 많은 보도로 인해 많이 완화되었으나, 군대가 아니라 경찰 조직인 의무경찰도 당시에는 가혹행위가 매우 심했었고, 심지어 구청과 시청에 복무하는 공익근무요원마저도 가혹행위 문제로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또한, 이전에도 군대 괴담이나 몇 가지 확인되는 소스로 비슷한 사건[6]이 존재했으나 이전 사건들은 그대로 묻히고 개선의 여지조차 없었던 반면 이번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100% 완벽하게 개선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지휘관들이 감시를 철저하게 하는 부대일수록 구타 및 가혹행위가 점차 줄어드는 형태였다. 즉, 수백 명이 함께 생활하는 중대나 대대에서 이전처럼 대놓고 구타하거나 가혹 행위하는 건 어렵게 되었지만 지휘관과 간부 감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독립 부대에서는 가혹행위 및 구타는 여전히 이루어졌다. 대부분 악질적인 구타 및 가혹행위 사고가 벌어진 부대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은 상급 지휘관들의 감시가 이뤄지기 힘든 독립 부대다.

그 결과 2008년 모 사단의 GP에서 황모 이병이 수류탄 사고를 일으키는 등사 고는 계속 터졌으며 특히 해병대는 개선된 점이 거의 없어 2011년 한국군 최대의 흑역사 중 하나로 기록되는 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4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 사건의 진범 김민찬도 현재 사형 선고를 받고 국군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나이도 많고 덥수룩한 스타일의 수감자가 지나가서 중사쯤 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김 일병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2014년 4월, 똑같은 제28보병사단 포병대대 의무대에서 의무대 후임병 폭행 사망 사건이 터지면서 제28보병사단은 제22보병사단과 함께 문제아 사단이라 불리게 되었다.

2021년에는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이 발생하였다. 타군에 비해 선진적인 이미지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공군도 타군과 마찬가지로 닫힌 사회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줘 큰 충격을 줬다. 이 사건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지휘라인까지 살펴보는 등 예의 주시하고 있다 보니 큰 파장이 예상된다.

2012년 5월 16일, 유족들의 동의하에 당시 상황을 찍은 영상이 유포되었는데, 사망자 유가족들이 재조사를 요구하기 위한 여론 환기 차원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육군 당국은 재조사 방침은 없다고 입장을 내놓았다.

4. 기타

사건 발생 초기 국방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망자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하지 않았다. 국군 수도병원(성남시), 국군 양주병원(경기도 양주시)[, 국군 일동병원(포천시, 현 국군 포천병원), 국군 벽제병원(고양시, 현 국군 고양병원) 등 군 병원 4곳에 분산 수용하였다. 이는 유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국군 양주병원의 경우, 사건 당일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모여있었기에 비무장 단독군장 차림의 기간병들을 내세워 유가족들의 병원 본관동 진입 시도를 봉쇄하기도 했다.

그러자 당시 국방부 장관인 윤광웅 예비역 제독의 정책 보좌관이었던 정태용은 현안 업무를 조정하는 국방부 현안점검회의에서 "왜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해 합동분향소를 차리지 않느냐" 고 따졌다. 이에 인사복지 업무를 총괄하는 김승렬 차관보는 "군의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야 말썽이 안 난다"라고 답변했다. 이에 화난 정 보좌관은 "그게 말이 되느냐, 시신을 국군 수도통합병원에 안치하고 합동분향소를 차려 유가족을 지원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정 보좌관의 노력으로 시신들은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지고 합동분향소가 안치되었다. 군 사정이 어쩌고 나발부는 이런 놈들은 정녕 미친 걸까...

또한 1953년 국방부 장관인 손원일 제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해군 출신으로 장관에 오른 윤광웅 장관 등은 분향소의 유가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국방부 간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분향소에 조문 갔다가 수십 명의 군인과 유가족, 언론사 취재진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거센 항의를 받았다. 평상시에도 '좌파정권에 투신한 좌파 군인'이라든지, 해군 출신이라며 국방부 내에 온갖 견제와 조롱을 받던 윤광웅 장관은 국방부 특히 육군 간부들에게 "그럴 줄 알았다"며 또다시 조롱당했다. 조롱하는 놈들이 똥 군기에 젖은 똥별들의 무리인 건 안 비밀.

그리고 이것이 사상 최초의 국방부 장관 조문이었다.

그동안 육군의 행태를 보면 구 일본군의 전통을 답습해 군대에서 사람은 소모품이라는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다. 사고로 죽었다고 쳐도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보직 해임해서 쫓아내고, 가혹행위 있으면 선임병 잡아다 감옥 집어넣고, 묵인한 간부 중 말단 몇몇 형사 처벌하고, 유가족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 처벌했으니까 그만 아니냐는 것이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17명의 우리 장병들이 전사하였지만 시신들을 분산 안치해 개별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합동위령제는 아예 열지도 않았다. 합동분향소나 위령제가 없는데 대통령, 국방부 장관 기타 등이 올 일은 만무하다. 그리고 위의 사건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연평해전 당시에도 이와 같은 행태가 반복되었다.

결국 이렇게 합동분향소가 차려지게 되어 유가족들이 뭉치게 되자 유가족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생방송으로 중계된 수사상황 발표에서도 유가족들이 집요하게 의문점을 물어보게 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부대의 실상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대 총기난사 사건 등 국군의 주요 사고 사건들을 죽 정리한 2005년 기사를 보면 먼 과거에도 이런 사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